2021. 6. 19. 20:11ㆍIT/Retrospective
들어가며
회사가 본격적으로 재택 근무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 이미 언론으로 '영구 재택(사실은 좀 다르긴 한데 ㅎ;) 확정'이라는 홍보 뉴스가 대대적으로 나간 상황이며, 회사 건물도 공용 오피스 방식으로 바뀔 예정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나는 대한민국에서 '프리랜서가 아닌 디지털 노마드'는 정말 운이 좋지 않으면 달성 불가능한 목표라고 여겨왔으나, 전례없는 판데믹 사태가 몰고 온 상황 때문에 불가능해 보이던 미래 근무형태를 지금 체험하고 있다. 계기가 조금 슬프지만, 그래도 앞으로도 이런 '재택 열풍'이 계속 확대되어 회사도 직원도 윈윈하는 업무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한다.
우연한 기회로 타지에서 한달간 원격 근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블로그의 구독자 분들은 아실테지만, 나는 이미 2019년에 노마드 코더에서 주최한 해커 하우스에 참가해서 베트남에서 10일간 디지털 노마딩을 해본 적이 있다. 이것도 색다른 경험이긴 하였으나, 당시는 내가 직장인이 아닌 취준생이었기에, 이번에 내가 체험한 근무와는 조금 다르긴 했다. 당시가 알파 테스트였다면 이번은 베타 테스트 정도의 느낌이랄까. 남들이 잘 하기 힘든 독특한 경험이기도 하여 이번에 후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네? 제가 됐다구요?
딱 두달 전 쯤에 회사가 시끌시끌했다. 한 통의 메일 때문이었는데, "타지에서 한달 일하기 체험단 모집"에 관한 글이었다. 재택 근무가 장기화되면서, '6월달 쯤에 우리 회사의 최종적인 근무 형태가 확정될 것'이라는 소문 아닌 소문이 돌고 있던 차에 정말 절묘한 타이밍으로 날아온 메일이었다. 메일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 새로운 근무 형태 모색을 위해, 타지에서 한달간 근무할 사람을 모집한다. 이 프로그램은 파일럿 프로그램이다.
- 타지는 수도권, 자택이 아닌 곳을 의미한다.
- 숙박비를 지원하겠다.
- 근무 형태 모색을 위한 프로그램이므로, 해당 기간에 휴가 계획이 없는 사람만 받겠다
이 메일을 받은 모든 사람이 제주도의 한 펜션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일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자기 돈 주고도 한달 살기를 시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하물며 회사 돈으로 지낼 수 있다니! 당연히 모두가 주택 청약 내지는 로또를 사는 느낌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지원했다. (최종 경쟁률은 20:1 정도였다고 한다) 당첨운과는 원래 거리가 멀었던 나는 지원 이후로 마음 편하게 살고 있었다. 얼마나 마음 편하게 살았냐면, 애초에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여 5월 중에 사람들 만나는 약속을 거리낌없이 잡고 다닌 탓에 당첨된 이후에는 일정 조정하느라 진땀을 뺐을 정도다.
그리고 블라인드에서도 기대감이 고조된 글들이 올라왔다. 요약하자면 '당첨된 놈들 어뷰징하지 말고 열심히 일해라. 니들 때문에 제도 정착화 안 되면 뒤진다' 였다.
대충 할 생각도 없었지만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다 ^~^
제주도로 떠날 준비
근무지는 지원자가 스스로 선정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나를 포함한 과반수의 지원자들은 제주도를 골랐다. 제주도 한 달 살기 후기를 찾아보면, 높은 물가 등의 이유로 후회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국내에서 제주도만한 위상(?)을 가진 관광지가 없기도 했고, 이런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리기 위해서라도 제주도를 가봐야겠다 싶었다. 설령 결과가 맘에 안 들더라도, "제주도는 가 봐도 실망할 까봐 안 갔어"보다는 "제주도 가서 살아보니까 그렇게 좋진 않았어"가 더 간지나지 않나?
숙소 구하기
막상 갈 준비를 하자니 귀찮은 게 한 둘이 아니었다. 가장 먼저, 숙소가 제일 귀찮았다. 내가 파일럿 프로그램에 선정된 것은 4월 중하순이었는데, 이 시점에서 5월 한달간 살 숙소를 골라야 했다. 잘 나가는 숙소는 2~3개월 전에도 다 예약이 나가는 마당에, 상당히 급박한 일정이었다. 회사에서 지원해 주는 숙박비가 무한하지도 않았기에 예산에 적당히 맞는 선에서 구해야한다는 것도 난이도를 올리는 주 요인이었다. 그러나, 제일 힘든 것은 "일할 만한 숙소 찾기가 힘든 것"이었다.
회사에서는 예전부터 보안 상의 이유로 카페같은 공공 장소에서 근무하는 것을 금지해오고 있었다. 그렇기에 숙소에서 잠만 자고, 일을 밖에서 하는 방식이 아니라, 아예 방 안에서 계속 근무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이 조건이 들어가는 순간부터 숙소 구하기는 정말 어려워진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근무 가능한 숙소"는 아래의 조건을 만족하는 숙소다.
- 듀얼 모니터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존재함(예: tv)
- 아이맥이나 맥북을 놓을 수 있는 책상이 존재함
- 등받이가 있는 의자가 존재함
- 인터넷 품질이 좋음
대다수 사람들에게 숙소는 휴식의 공간이지, 업무 공간으로 인식되진 않기 때문에 예약 가능한 숙소의 절반 이상이 이런 여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책상이 있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곳도 많았고, 있다 하더라도 '저기에 아이맥 올려놓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작은 책상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당연하다, 보통 데스크탑까지 통째로 들고와서 자기 방에서 일을 하는 사람은 정말 몇 없을 것이다. 숙소 입장에서 그런 쓸데없이 비싸고 큰 가구를 방 안에 들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니즈를 최대한 만족시키는 숙소를 찾았다. '아이디노'라는 숙소였는데, 숙소 설명에서부터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이라는 설명이 붙어있었기에, 적어도 여기만큼은 내가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도록 도와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도 꽤 만족하면서 지냈는데, 자세한 숙박기는 따로 글로 남기도록 하겠다.
교통 수단
제주도 다회차 여행의 경험에 비추어봤을 때, 차 없이 제주도 여행을 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모험이다. 그러나 이 흉흉한 시국에도 제주도 관광은 참으로 인기가 많아서 렌터카 가격이 많이 올라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내가 제주도까지 들고가야 할 짐은 많았다. (아이맥, 키보드, 맥북, 통기타(??), 오큘러스(???), 닌텐도 스위치(?????) 등) 그래서 나는 직접 차를 배에 싣고 이동하기로 했다.
내가 남부 지방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같이 쓰는 차(쏘나타)를 몰아 여수 여객선 터미널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이는 꽤 대담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이 여정은
- 내 첫 고속도로 운전과
- 내 첫 장거리 운전과
- 내 첫 차량 선적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부랴부랴 하이패스를 찾아 달고, 블랙박스는 때마침 고장이 나버려서 새로 사서 달고, 정비도 다시 받고 부산하게 움직여야 했다. 꽤 고된 과정이었지만, 운전 경험치도 쌓였고, 렌터카 비용도 아꼈고, 무엇보다 짐을 옮기는 수고를 많이 줄일 수 있어서 결과적으로 만족한다. 차량 선적에 대한 후기는 언젠가 따로 남기기로 하였다.
바다를 보면서 일하자!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도착. 아이디노는 객실 침대에 누우면 바로 바다가 펼쳐지는, 뷰가 굉장히 좋은 곳이었다. 1층에는 수영장이 있어 허세 부리기(?)에 정말 좋았고, 카페도 겸하고 있어 커피를 사러 밖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내 니즈에 정말로 딱 맞는 숙소였다.
제주도로 이동했다고 해서, 딱히 업무가 불편해지거나 편해지지도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이미 1년을 넘게 회사 밖에서 근무를 해 왔었는데, 그게 위치를 바꾼다고 해서 영향을 받을 리가 없었다. 회사 자체가 원격 근무를 전제를 하고 돌아가고 있었으므로 나에겐 업무 방식의 변화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아마 팀원들도 내가 집에 있던 시절과 똑같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오히려 더 좋아진 점이 있었다. 업무 도중에 기분 전환 겸 바다를 보면서 산책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특히 5월은 머리를 쓸 일(?)이 많았던지라 이 풍경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여가를 즐겨보자
제주도에 있으면서 "국내판 워킹 홀리데이"라는 느낌을 좀 받았었는데, 역시 마케팅 업계에서는 재빠르게 '워케이션(일 Work + 휴가 Vacation의 합성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었다. 이 근무 제도는 사실상 '워케이션'이었다. 모처럼 잡은 좋은 기회에 즐길 수 있는 것은 최대한으로 즐기다 오고 싶었다. 평일은 근무를 해야했기에 온전히 시간 내기가 어려웠지만, 그래도 유연 근무제 덕에 퇴근 시간을 앞당기거나 출근 시간을 늦추는 방식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수도 있었다.
별 사진 찍기
새별오름 근처의 나홀로나무에서 별 사진을 찍어보았다. 제주도의 날씨가 참으로 변화무쌍해서 찍기가 쉽지 않았다. 실제로 세번이나 허탕을 치고 겨우겨우 찍는 데 성공하였다. 은하수도 나름 잘 나와서 만족스럽다.
서핑하기
내 성향(?)을 아는 사람은 전부 물음표를 띄울 액티비티다. (몸 쓰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편) 주위 사람들이 하도 '바다까지 갔는데 서핑 정도는 해봐야하지 않겠냐?' 라며 바람을 불어넣어주신 덕에 도전을 해봤다. 너무 못해서 쪽팔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첫 강습만에 (강사님이 만들어준) 파도를 탈 수 있었다. 예상 외로 정말 재미있었고, 강습에서 만난 사람들과도 친목을 다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바다에 갈 일이 있으면 자주 도전해보려고 한다.
연돈 도전
이제 제주도의 명물이 되어버린 전설의 그 돈까스 식당 연돈.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줄 서서 먹는 매장이었으나, 테이블링 앱을 통한 예약 제도로 바뀌게 되었다. 삼수 끝에 예약에 성공해서 다녀올 수 있었다. 정말 맛있게 먹었고, 다음에 간다면 등심까스도 도전해보고 싶다.
수풍석 뮤지엄
친구가 추천해줘서 가게 된 수풍석 뮤지엄. 이곳은 하루에 총 2회의 전시를 가지며, 방문객 수도 한정되어 있어 예약이 필수인 곳이다. 내가 5월 초에 알아봤을 때부터 이미 6월 말까지 예약이 다 차있는 상태였다. 그래도 한달 내내 존버를 하다보니 빈 자리가 생겨서 예약할 수 있었다. 돌 박물관, 바람 박물관, 물 박물관 순으로 전시가 이루어졌고, 각 전시 작품마다 큐레이터 분이 상세히 설명해주셔서 뜻 깊은 감상을 할 수 있었다. 굉장히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디지털 노마드, 실현 가능한 꿈인가? 가능하다!
제주도에서의 한 달 일하기를 끝내고 고향에 돌아온 지도 어느새 2주일이 지났다. 한 달이 너무 쏜살같이 지나가서 내가 제주도에 다녀온 적이 있긴 한가.. 꿈을 꾼 건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한 달이 아니라 한 1년을 살라고 해도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이번 체험으로 근무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었다. 재택 근무를 1년 넘게 하면서, 홈 오피스의 편안함에 빠져 "이동하면서 근무하는 방식은 불편하다"고 막연하게 생각해 왔었다. 실제로 제주도 왔다갔다 하는 데 드는 비용은 꽤 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하는 느낌으로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큰 장점이란 것을 몸소 깨닫게 되었다.
제주도에서의 원격 근무를 경험하고 나니, 미련없이 서울의 방을 뺄 수 있었다. 한 곳에 묶여있지 않고 옮겨다니며 근무하는 것도 꽤 괜찮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고향에 있지만, 이후로도 디지털 노마딩을 여러번 시도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러다 또 마음에 드는 어딘가에 정착할 수도 있을 것도 같고 그렇다. (그래도 내년 중에는 다시 수도권 쪽에 방을 구하게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제 회사는 공식적으로 '타 지역에서의 근무'를 허가하게 되었고, 코로나가 끝난다면 해외에서의 근무도 가능해질 전망이다. 그 때가 되면 오키나와나 베트남에서 일해보는 게 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