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3. 23:45ㆍRandom
들어가며
저는 여러모로 '마초'와는 거리가 꽤 되는 남자입니다. 체구가 왜소한 것은 물론이고, 롤 안하고 축구 관심 없으며, 취향은 마이너해서 평범한 남자들과는 대화 코드가 안 맞는 경우가 많았고, 여초인 학과를 다녀서 그런지 여자들과의 대화가 편한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이다보니 어쩌면 제가 퍼스널 컬러에 관심을 갖는 것도 당연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화장 한 번 해본 적 없는 남자 개발자가 퍼스널 컬러 진단을 받은 경험을 공유하고자 쓰였습니다.
퍼스널 컬러가 뭔데 십덕아
퍼스널 컬러(Personal Color).. 직역하면 개인 색이다. 얼핏 읽으면 개성에 대한 은유적 표현인가? 싶기도 하지만 간단하게 표현하면 "자기 자신에게 잘 맞는 색" 정도가 된다. 지식의 보고 꺼무위키에 따르면 퍼스널 컬러는 아래와 같이 정의된다.
사람의 피부톤과 가장 어울리는 색상을 찾는 색채학 이론이다. 피부톤에 어울리는 색을 웜톤 쿨톤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부르는 것이 바로 이 퍼스널 컬러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어떤 색조 화장품이나 옷, 장신구가 어울리는지를 찾기 위해 주로 사용한다.
본인에게 어떤 색이 베스트인지 알고 싶을 때, 혹은 어떤 색이 미묘하게 안색이 탁해보이거나 어두워보이거나 창백해보이는지 알고 싶을 때 이용하면 좋다. "착붙"의 개념 자체가 "안색이 뜨지 않고 건강해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잡고 있다.
문서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색채학 이론의 한 갈래며 아직까지도 연구 중인 분야라고 한다. 사실 어떤 색 조합이 어울리고 어울리지 않는다를 과학적으로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게 정해져 있었으면 예술의 세계는 훨씬 더 간단하고 더 지루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므로 퍼스널 컬러 또한 어디까지나 '가이드 라인' 수준일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변화될 것이다.
님이 퍼스널 컬러 알아서 뭐하시게요
내가 퍼스널 컬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가 옷을 드럽게 못 입기 때문이다. 서두에 '남자보다 여자와 대화가 더 잘 통하는 남자' 어쩌고 운운한 것 치고는 패션에 대한 센스는 엉망이었다. 그나마 주위 사람들로부터 '와 옷봐 탑골공원에 산책나온 할아버지인 줄', '와 신발봐 헌옷수거함에서 주워온 줄' 등의 피드백을 받으며 지뢰를 피하는 능력이 조금씩 늘긴 했으나... 조금 더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으면 싶었다.
때마침 퍼컬 진단을 받아본 여사친 한 명이 "퍼컬을 알게 된다고 갑자기 옷 입는 센스가 좋아지거나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최악은 피할 수 있게 된다. 이 점이 퍼컬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며, 훗날 퍼컬 진단을 받으러 가게 된다면 같이 따라가주겠노라고 약속해줬다.
무수히 많은 예약의 요청이...
온갖 매체에서 여쿨, 봄웜 등등 퍼스널 컬러 용어를 언급을 해대는지라 인기가 많다는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예약을 하려고보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인기임이 그제서야 실감이 됐다.
막연하게 "1주일 전쯤에 알아볼까?" 정도로 알아보면 예약 잡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어떻게 운이 좋아서 일주일 안에 진단을 받을 수 있는 곳을 찾아 예약했다.
내가 방문한 곳은 코코리 색채연구소 홍대점이다.
코코리 색채연구소를 방문하다
시간에 맞춰서 방문하니 여성 상담사분이 반갑게 맞아줬다. 곳곳에는 "여기 색채 연구하는 곳 맞음"이라는 분위기를 풍기는 물품들이 적당히 배치되어 있었고, 정황상 강의와 진단을 병행해서 하는 듯했다. 나는 진단을 받는 곳에 들어가 상담사분의 자기 소개를 듣고 곧바로 퍼컬 진단을 시작했다.
퍼스널 컬러는 점집에서 점 보듯이 단순히 게슴츠레 눈을 뜨고 나를 30초 정도 쳐다보다가 "알겠다! 총각은 파랑이여 파랑!" 하듯이 쓱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기억으로는 진단 완료까지 총 1시간 30분이 걸렸던 것 같다. 나름대로 과학적인 수단도 동원하는데, 큐브 측색기가 그 중 하나다.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람의 피부색을 측정하는 기계'다. (학부생 시절에 피부의 rgb 값을 뽑아서 어떤 화장품과 매칭될 수 있을지 알려주는 기계와 앱을 잠깐 구상했었는데 실제로 이런 게 있을 줄은 몰랐다)
신기한 점은 색 값이 rgb나 cmyk가 아니라는 점이다. rgb는 컴퓨터에서 색을 표현하기 위한 색 체계, cmyk는 인쇄물에서 색을 표현하기 위한 색 체계다. 하지만 사람의 피부는 디지털 데이터도, 인쇄물도 아니기에 전혀 다른 색 체계를 사용하고 있었다. 나로선 처음 들어보는 Lab였는데, 대충 찾아보니 '인간이 실제 눈으로 보는 색을 표현하고자 하는 색 체계' 정도로 요약되는 것 같았다. 이 lab 값을 토대로, 내가 쿨톤인지 웜톤인지를 판별할 수 있었다. 나는 b-a = 3.5였으므로 쿨톤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마! 니 색 좀 아나! 확인 들어간데이
퍼스널 컬러는 매우 크게는 두 분류다. 웜톤/쿨톤이 그 예고, 여기서 좀 더 들어가면 봄웜/여름쿨/가을웜/겨울쿨 로 또 나뉘게 된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딥/비비드/페일 등 온갖 수식어가 붙게 되는데, 진단의 최종 목표는 바로 이 세부 톤까지 찾아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드레이핑 천을 대조해가며 어떤 색이 잘 어울리는 지를 봐야한다.
상담사 선생님께선 "상담자분이 직접 색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저는 옆에서 바로 말해드리지 않겠습니다. 한 번 보면서 어떤 색을 댔을 때 좀 괜찮아 보이는 지를 말해보세요" 라면서 수십가지의 천을 대조해주셨다. 이런 쪽에 워낙에 자신이 없으니 O/X 퀴즈 푸는 느낌으로 임해야했다. 그래도 29년간 헛살진 않았는지 적중률은 높았는데, 옆에서 상담사 선생님이 "그렇죠! 이 색을 입으면 피부가 갑자기 부해보이죠? 이 색은 핏기가 갑자기 없어지죠? 이 색은 얼굴이 붉은 기가 올라오죠?" 이런 식으로 근거를 제시해주실 때마다, 누가 INTP 아니랄까봐 "옷 입는다고 피부 색이 바뀌어보이면 그건 카멜레온 아닌감..." 하는 생각을 해버릴 뻔 했으나,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인지하는 쪽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의미겠거니 하고 스스로 납득했다.
실제로 같이 갔던 친구(센스 좋음)도 상담사 선생님의 말에 많이 동조해줘서 그 선택을 믿기로 했다.
그래서 제 퍼스널 컬러는...
최종 결과가 나왔다. 내 퍼스널 컬러는
- 겨울 쿨톤. 그 중에서도 윈터 딥
- 무채색 계열이 더 잘 어울리는 스타일. 상의는 밝은 색보다 어두운 색
- 탁한 파란색과 어두운 자주색이 잘 어울림. 수트를 입을 때는 터콰이즈 색 계열 정도
- 피부는 29호 파운데이션
- 악세서리는 골드보단 실버
- 다른 색의 옷을 입고 싶다면 썸머 페일이 가장 적당하다. 파스텔톤 계열이 그나마 나을 것이란 이야기
- 염색은 다크 브라운 정도를 벗어나지 말라
라는 결론이었다. 친구는 내가 평소에 밝은 색/원색 위주로 입고 다녀서 왠지 여쿨이 나올 것 같았는데, 예상 외로 겨쿨이 나와서 놀랍다는 반응이었고, 덧붙여 "네가 좋아하던 밝은 색들 다 버려야겠네 ㅜㅜ" 라며 애도해줬다.
그리고 결과 요약을 다음주 화요일에 카카오톡으로 보내줬다. RGB는 아무래도 기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니 그냥 종이로 인쇄해주는 게 제일 좋지 않나 싶었는데, 분실 문제도 있고 종이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바래지기도 하니 간편하게 카카오톡으로 보내준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앞으로 옷이나 화장품을 살 때 해당 카톡을 참고하라고 하더라. 나중에 시간나면 따로 정리해서 pdf 형태로 저장해둘까 한다.
진단받고 나니 어때요?
만족한다. 이 날 나에게 맞는 파운데이션을 구매했고, 가끔 꾸미고 다닐 필요가 있을 때 잘 사용 중이다. 앞서 말했듯이 worst color를 피할 수 있게 되어서 옷 선택 때 고민이 조금 줄어들었다. 약간의 자신감을 얻은 것은 덤. 그리고 퍼컬이 한창 트렌드인 만큼 좋은 대화주제를 얻게 되었다.
내가 모르는 나 자신에 대해 새롭게 알아간다는 과정은 꽤 괜찮은 경험이라 생각한다. 그게 MBTI와 퍼스널 컬러가 지금 한창 인기인 이유가 아닐까. 이런 쪽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후회하지 않을 결정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코코리 색채연구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첨부하고 끝마치겠다.